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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여행 본문

白 樺

가을여행

다음그다음 2008. 10. 13. 15:40

나홀로 여행 !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푸~욱 빠져보리라 했던 나의 계획은 착각이었을까?

상봉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니 의정부, 포천, 신철원, 김화, 와수리를 거쳐 육단리에 이르더라.
마침 토요일이라서 군인들 면회가는 사람들이 많이 탔다.
그 틈 속에 내가 끼어 3시간의 기나긴 여정을 밟은 거다.
내가 창가에 앉고, 그 옆 좌석에 아가씬지 아줌만지 구분할 수 없는 여자 분이 앉았다.
서울을 벗어나 차창 밖으로 달리는 가을 풍경은 정겹기만 했다.
그 정겨움에 푹 빠져있을 즈음, 옆에 앉은 여자 분이 슈크림빵과 음료수를 건넨다.
점심때는 되었지만, 그 때 사실은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 받으면 그 여자 분이 겸연쩍어 할까봐 억지로 받아먹었다.
어디를 가냐고 묻기에 육단리 간다고 했더니,
자기도 동생 면회하러 육단리까지 간단다.
이어서 누구 면회가느냐고 묻는다.
'면회? 글쎄요'하고 나는 말끝을 흐리고 다시 차창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다가 내 핸드폰이 울린다. 진동으로 해 놓는다는 것을 깜박했지 뭐야.
전화 끊고 나니 이 분이 핸드폰 음악이 좋다며, 그 노래 제목이 뭐냐고 묻는다.
'You call it love'라고 했더니 이것을 시작으로 그 분의 이야기는 내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나는 원래 말주변도 별로 없고, 말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그 분의 얘기를 듣기만 하며 '네, 그랬군요.', '아, 그렇겠네요.' 라고만 연발했다. 눈은 자주 창 밖을 응시한 채 말이다.
또 다시 누구 면회가느냐고 물어온다.
"실은 요. 예전부터 6.25 격전지 수피령 고개를 한 번 넘어보고 싶었고 해서
수피령고개도 가보고, 간 김에 매월대(세조의 왕위찬탈로 울분을 품고 김시습이 은거하던 곳)와
'임꺽정' , '다모' 세트장을 둘러보려구요" 라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려 으레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나는 수피령 고개를 찾아가기 위해 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걸었는데, 길 잘 못들은 건 차치하고라도 이게 웬 망신.
여기는 38선 위쪽이고 군사 작전지역이어서 다른 곳처럼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
국군 초소에서 신분확인을 위해 한참을 묵어야 했다.
다 확인된 후에야 어디론가 연락을 해 차 한 대 보내달라고 한 후
거의 한 시간 지나서야 짚차가 오더니 그 차로 나를 육단리까지 실어다 주었다.
그 시간이 저녁 7시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육단리에서 한참을 또 방황하다보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식당에 혼자서는 잘 안 들어간다.
그런데 들어가야겠다. 들어갔다. 식사하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식당 아줌마도 혼자 들어온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흘깃 한 번 쳐다보고는 쟁반 하나 손에 든 채 주방 쪽으로 가버린다.
나는 멋쩍게 되돌아 나와야 했다.
다 포기하고 다시 서울로 가기로 마음먹고 버스 터미널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
낮에 같이 타고 온 그 여자 분이 발길을 세운다.
밖에 나오면 다 만나게 되어있는 좁은 동네라서 그 만남이 우연이랄 수도 없었다.
어디 가느냐고 물어 그냥 서울로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버스가 없다고 한다.
낮에 내가 겪었던 일을 길거리에서 얘기했더니
그 분 동생(군인)이 맞장구를 친다. 그러는 곳이라고.


그러고 보니 낯설고 물설은 머나먼 이역 동네에서 이 밤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마 사람이 이처럼 그리운 건 처음이었을 거다.
버스에서 잠시나마 낯익었던 이 분이 무척이나 친근감이 들어오는 것이다.

버스 안에서 좀 더 친근하게 얘기를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우선 저녁식사부터 하자고 했더니 그들은 먹었단다.
그럼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더니 좋다해서 술집으로 들어갔다.
이 일행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셨다. 낯선 사람과 술 마셔보기도 처음이었다.
자정이 넘도록 마시고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낮에 숙소를 정해 놓았는데,
나는 예약도 안 해놓았으니 이거 또 완전 낭패였다.
토요일은 면회객 때문에 방이 모자란단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윤상병(그 여자 분 동생)이 자기네 방으로 가자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 하고
말 끝을 흐렸더니 그 분까지 합세하여 취한 날 이끌어 간다.


숙소에서 또 맥주를 사다가 마시기 시작했다.
이 때는 내가 말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새벽 4시.
윤상병이 먼저 취해 떨어진다. 나도 취하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나도 일부러 같이 떨어져 버렸다. 그 여자 분 편하라고.
눈을 뜨니 오후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부랴부랴 일어나 씻고, 그 일행들 점심 사주고서는
빨리 가야된다고 핑계를 둘러 대고
윤상병 휴가나오면 전화하라고 하면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정말로.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씁쓸한 가을여행은 미완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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