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ime trip (79)
다음그다음
곰나루의 슬픈 전설 공주의 옛이름 '웅진'은 원래 금강가에 있는 나루터인 「고마나루(곰나루)」에서 비롯되었어요. 이 곰나루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지요. 옛날 이곳에 살던 한 사내가 하루는 인근에 잇는 연미산에 놀러갔다가 길을 읽고 배가 고파서 바위 굴 속에 쉬고 있던 중 한 처녀를 만났어요. 사내는 처녀와 굴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부부의 인연을 맺었지요. 그러나 매일 굴 밖으로 나갔다가 오는 처녀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따라가 봤더니 처녀가 곰으로 변하는 게 아니겠어요? 놀라 도망가려던 남자를 암콤은 동굴 속에 가두어 두고 살았어요. 그러는 동안 자식까지 둘을 낳았고 이제야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안심한 암콤이 굴을 나간 사이 남자는 금강을 헤엄쳐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도망을 가버렸어요. 뒤늦게 사실을..
서기 243년에 왕위에 오른 고구려 중천왕은 동천왕의 아들로 왕비 연씨와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투던 관나부인(貫那夫人)이 그 투기가 심해지자 서해바다에 수장한 일(AD251)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9척이나 되는 길은 머리에 윤기가 흐르는 미모가 아주 빼었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천왕은 그녀를 소후로 삼았다. 그러나 왕비와 소후는 서로 질투하여 중천왕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때에 고구려는 위나라에게 크게 패하여 국력이 쇠퇴해지고 있었다. 하루는 왕비가 말했다. ‘들으니 위나라에서는 머리 긴 여인을 천금을 주고 구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마마께서 만일 머리 긴 여인을 얻엇 선물로 위나라에 보내시옵는 게 어떠하온지요? 그리하오시면 위나라의 위험도 적어지고 나..
국읍(國邑) 삼한시대(三韓時代) 여러 소국(小國) 가운데 정치적 중심이 되는 대읍락(大邑落)을 말한다. 삼한은 여러 소국(小國)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한(馬韓)은 54개, 진한(辰韓)에 12개, 변한(弁韓)에 12개의 소국이 있었다. 이러한 소국은 여러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국 내부에서 정치⋅군사적 역할을 담당하는 지배층과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으로 계급 분화가 일어나면서, 주로 지배층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읍락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읍락을 곧 국읍이라고 한다. 즉, 소국은 여러 개의 읍락과 그들 중 중심이 되는 읍락인 국읍(國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계급분화가 이루져감에 따라 소국을 대표하는 정치적 통솔자가 등장하는데,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
목지국(目支國)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다가 사라질 무렵, 그 주변 지역에서는 한민족의 또 다른 집단들이 부족 단위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각 세력은 다른 부족과의 연합 또는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만주 지방에는 부여와 고구려가 자리 잡고, 한반도 북부 동해안 지방에는 옥저와 동예가 자리를 잡았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삼한이 발전하였다. 삼한(三韓)은 여러 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한에는 50여 개의 소국이 있었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에는 각각 12개국이 있었다고 한다. 목지국은 마한의 소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소국으로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의 왕으로 행세했다고 한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
낙랑남부도위부(樂浪南部都尉府) · 낙랑동부도위부(樂浪東部都尉府) 낙랑은 BC 82년 진번군(眞蕃郡) 일부와 BC 75년 현도군(玄菟郡)에 폐합된임둔군(臨屯郡)의 옛 땅을 합쳐 25현(縣)을 두었다. 그러나 영토가 너무 넓어 이들 현을 중앙에서 통제하기 어려워 현을 나누는 관부(官府)로서 진번 옛 땅에는 낙랑 남부도위를, 임둔 옛 땅에는 낙랑 동부도위를 두어 각각 7현씩 관할하게 하였다.
대방군(帶方郡) 대방(帶方)은 원래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진번군(眞番郡) 15 속현(屬縣)중 하나의 현(縣)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한강 이북 경기도 지방과 자비령(慈悲嶺) 이남의 황해도 지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이를 중국 동북지방에 비정(比定)하는 견해도 있다. 진번군은 중국 군현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BC82년에 진번군은 폐지되었는데, 진번군에 소속된 15개 현(縣) 중 8개 현은 폐지되고, 7개 현만 낙랑군(樂浪郡)에 통합되었으며, BC 75년에 낙랑군은 7개 현이 있던 곳에 낙랑남부도위(樂浪南部都尉)를 설치하였다. 그 7개 현(縣)은 낙랑남부도위(樂浪南部都尉)의 관할에 들어가 명맥을 유지하다가 후한(後漢)이 건국(AD25)되면서 후한의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
낙랑군(樂浪郡) 고조선(古朝鮮) 멸망 이후 한(漢)은 고조선의 옛 땅에 지방 행정 기구인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은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을 말한다. 낙랑군은 이 한사군의 하나이다. 낙랑군의 관할지역은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조선은 BC108년, 한의 침공을 받아 항전하다가 멸망하였다. 한은 고조선의 옛 영토에 4개의 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곧 한사군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낙랑군은 고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에 설치된 조선현(朝鮮縣)을 중심으로 설정되어 한사군 중 가장 중요하였다. 다른 3군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거나 한반도 밖으로 옮겨졌지만 낙랑군은 처음 설치된 위치에 계속 존속하였으며, 한이 멸망하고 진(晉)이 들어..
한사군(漢四郡) 한나라가 고조선의 옛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구역. 한군현(漢郡縣)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BC 108년),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해 위만 조선 일부지역에 낙랑군(樂浪郡)과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과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 낙랑군(樂浪郡)·진번군(眞番郡)·임둔군(臨屯郡)·현도군(玄菟郡) 등 4군을 가리켜 한사군(漢四郡)이라 한다.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은 BC 108년에 설치하고, 그 이듬해인 BC 107년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BC 82년에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지고 현도군은 BC 75년에 서북지역으로 축출되었다. 낙랑군은 AD 313년에 고구려의 ..
위만조선[衛滿朝鮮] BC195년 연왕(燕王) 노관이 한(漢)에 반기를 들어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 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고 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
기자조선(箕子朝鮮)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부 족보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므로 참고로 보시면 됩니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