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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신화 본문
[1] 백제 건국신화
주몽은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부여에서 주몽이 낳은 아들(유리)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 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형제는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러나 비류가 미추홀은 땅이 물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케 살 수가 없다하여 위례로 돌아와서 그곳의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 그만 부끄럽고 한스러워 병이 되어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로 귀속하였다. 그 후에 처음 위례로 올 때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온조는 그 출신지가 부여라 하여 성을 부여씨로 불렀다.
[2] 삼국사 본기(三國史本紀)의 기록이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 또는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화난을 피해 도망해 나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졸본주의 왕에겐 왕자는 없고 다만 딸 셋만 있었다.
졸본주의 왕은 주몽을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서 그의 둘째딸을 시집 보내어 그를 사위로 맞았다.
그뒤, 오래지 않아 졸본주의 왕은 죽고 주몽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주몽은 그 졸본주 왕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이 비류요, 둘째 아들이 온조다.
이들 비류와 온조는 나중에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오간과 마려등 열사람의 부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드을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비류와 온조 일행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부아악에 올라가 근거지가 될만한 땅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서 근거지를 잡으려고 했다. 열사람의 그 부하들은 비류에게 간했다
"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멧부리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그리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어 그 천연으로 이룩된 요새의 이로움으로 보아 얻기가 어려운 지세이온데 이곳에서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비류는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따라온 백성들을 아우 온조와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서 자리 잡았다.
온저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그 열사람의 신하들을 그의 보익으로 하여 국호를 <십제>라 했다.
그것은 한나라 성제 15년(BC 18)의 일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짠 때문으로 하여 안거할 수가 없어 되돌아왔다. 돌아와, 위례에 도읍이 바야흐로 자리 잡히고 인민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침내 부끄러움과 후회로 하여 죽고 말았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했다고 해서 그뒤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백제의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다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
뒤에 성왕 연대에 이르러 도읍을 사자에 옮기니 지금의 부여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