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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본문
낙랑군(樂浪郡)
고조선(古朝鮮) 멸망 이후 한(漢)은 고조선의 옛 땅에 지방 행정 기구인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은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을 말한다. 낙랑군은 이 한사군의 하나이다. 낙랑군의 관할지역은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고조선은 BC108년, 한의 침공을 받아 항전하다가 멸망하였다. 한은 고조선의 옛 영토에 4개의 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곧 한사군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낙랑군은 고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에 설치된 조선현(朝鮮縣)을 중심으로 설정되어 한사군 중 가장 중요하였다. 다른 3군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되거나 한반도 밖으로 옮겨졌지만 낙랑군은 처음 설치된 위치에 계속 존속하였으며, 한이 멸망하고 진(晉)이 들어선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낙랑군은 기본적으로 한에서 파견한 지방관(태수=太守, 현령=縣令)이 한의 제도를 가지고 통치하였으나, 토착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재지 수장(在地首長)에 의한 전통적 지배 방식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또 토착인들을 하급 관원으로 쓰면서 중국계 주민과 토착 주민 간의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어느 정도 토착화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때문에 본국이 멸망한 후에도 상당 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
낙랑군은 처음에는 조선현 및 11개의 속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3군의 폐지나 이동 이후 그 일부를 포함시키면서 영역이 확장되었다.
BC 82년에는 옛 진번군(眞番郡)의 7현에 낙랑남부도위가, 옛 임둔군(臨屯郡)의 7현에 낙랑동부도위가 설치되었다. BC 45년에는 소속 현이 25개에 이르렀으며, 인구는 28만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AD 30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왕조(王調)의 반란을 계기로 낙랑 남부도위와 낙랑동부도위가 폐지되고 다수의 속현이 방치되면서 낙랑군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낙랑군은 후한(後漢) 멸망 후 요동의 공손씨(公孫氏), 서진(西晉) 등의 지배를 받다가 313년 고구려(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망하고,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평양 서남쪽 토성리 주변의 2,000여 기에 달하는 고분군은 낙랑군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낙랑군은 고조선의 중심지에 설치되어 420년간 주변의 여러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동방에 대한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침투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