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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薯童謠) 본문

Time trip

서동요(薯童謠)

다음그다음 2007. 5. 25. 18:57

서동요(薯童謠) 
 

[1] 원문

 

 

[2]  풀이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정을 통해) 두고,
맛둥(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


[3] 요점정리

 작자 : 백제 제 30대 무왕, 서동(薯童)/ 양주동 해독
 연대 : 신라 진평왕(579∼632) 때(599년 이전)
 갈래 : 향가
 형식 : 4구체
 성격 : 민요적 동요(童謠)
 표현 : 풍자적, 직설적
 제재 : 선화 공주와의 사랑
 주제 : 선화공주의 은밀한 사랑, 선화공주에 대한 연모의 정
 내용 :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기 위한 노래.
          아내로 맞기 위하여 선화 공주의 거짓 비행을 계략적으로 풍자함
 성격 : 참요[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계림요〉,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목자요(木子謠)〉, 미나리와 장다리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관련지어 노래한 
       〈미나리요〉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예언, 암시하는 노래]
, 동요
 의의 : 현전(現傳)하는 가장 오랜 향가, 4구체 향가가 민요나 동요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
 기타 : 이 노래의 배경 설화로 서동설화가 있고, 백제의 익산 미륵사의  연기설화에도
         서동설화와 비슷한 것이 있다.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4] 배경설화 

 제 30대 무왕(서기 600-640)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홀로 되어 집을 서울 남쪽 못가에 짓고 살았는데 못에 있는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며, 도량이 한없이 넓었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해 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그가 서울의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그는 마침내 이런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薯童(서동)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이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모든 신하들이 탄핵하여 공주를 시골로 유배시킨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고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
고 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서동이
  "좋소"
하고 금을 모았으니 그것이 구릉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
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을 써서 그 금을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황은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지금의 미륵산 사자암)에 가려고 용화산(지금의 익산군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 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그 곳에다 미륵삼존의 상을 세우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하였는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확실치 않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5] 해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백제 무왕이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지어 불렀다는 노래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연못가에 살고 있었는데, 그 못에 사는 용(龍)과 정을 통하여 그를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마[薯]를 캐어 팔아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서동(薯童 : 맛둥)이라 불렀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수도 경주로 가서 그녀를 모함하는 노래(서동요)를 지은 후, 아이들에게 마[薯]를 나누어 주고 이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진평왕의 오해를 산 그녀를 결국 궁에서 쫓겨나게 만들어 자기의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따라서, 이 노래의 외형적 주제는 선화 공주의 불량성을 풍자하는 것이며, 그 내면적 주제는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웅 설화의 일반적인 과정을 볼 때, 영웅의 일생은 결혼에 의해 성공의 실마리가 풀리는 경우가 많다. 이 '서동요'는 이러한 성공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동요적인 단순한 내용을 노래한 민요로서 전래 민요가 동요로 정착된 유일한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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