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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읍 본문
국읍(國邑)
삼한시대(三韓時代) 여러 소국(小國) 가운데 정치적 중심이 되는 대읍락(大邑落)을 말한다.
삼한은 여러 소국(小國)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한(馬韓)은 54개, 진한(辰韓)에 12개, 변한(弁韓)에 12개의 소국이 있었다. 이러한 소국은 여러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국 내부에서 정치⋅군사적 역할을 담당하는 지배층과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으로 계급 분화가 일어나면서, 주로 지배층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읍락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읍락을 곧 국읍이라고 한다. 즉, 소국은 여러 개의 읍락과 그들 중 중심이 되는 읍락인 국읍(國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계급분화가 이루져감에 따라 소국을 대표하는 정치적 통솔자가 등장하는데,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으로 불렸다.
국읍은 지배층의 거주집단이다 보니 재화가 집중되고 그 재화의 유통⋅분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읍은 경제적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다른 소국 및 정치 집단과의 교역이나 교섭 역시 국읍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농경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제천 행사와 같은 종교 활동도 역시 국읍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국읍은 소국을 구성하는 여러 읍락 중 지배층이 거주하는 정치⋅군사⋅경제⋅종교적 중심 읍락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가 정치⋅군사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삼한에서는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소도(蘇塗)가 따로 존재하였으며, 제천 행사와 같은 종교 행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도 있었다. 이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었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읍은 하천을 끼고 있거나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아 주변을 관찰⋅감시하기 좋고 방어하기도 용이한 입지 조건을 가졌다. 또 목책(木柵)이나 환호(環濠)와 같은 방어용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흙으로 성벽을 쌓은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