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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處容歌) 본문

Time trip

처용가(處容歌)

다음그다음 2008. 6. 14. 09:54

처용가(處容歌) 
 

▣ 원문과 풀이





[1] 풀이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2] 요점 정리

- 작자 : 처용(處容)
- 연대 : 신라 헌강왕(875-885)
- 갈래 : 향가
- 형식 : 8구체(4·4조의 민요조로 됨)
- 표현 : 향찰로 표기, 
          직서적(直敍的 :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 표현
          체념적인 농사(弄詞), 풍자, 제유법
- 성격 : 축사(逐邪)의 노래
- 주제 : 아내를 범한 귀신을 쫓아냄, 혹은 아내의 부정을 체념함,  축신(逐神-귀신을 쫓음)
- 내용 : 처용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고 있는 역신(疫神)을 물리치기 위해 부른 노래
           아내를 빼앗은 역신에게 관용의 정신을 베푸는 이야기.
- 의의 :
     1. 벽사 진경(僻邪進慶 : 간사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소박한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 : 무속의 노래)이다.
        무격 신앙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처용은 제웅(역신을 쫓기 위하여 음력 정월에
        동구밖에 내던져 액을 면하게 한다는 볏짚 인형. 처용과 제웅은 발음 및 축사의 기능이
        같으므로  처용을 곧 제웅이라고도 한다.)
과 연결시킬 수 있다.
     2. 의식무, 또는 연희의 성격을 띠고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계속 전승되었다.
     3. 고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解讀)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4. 현전하는 신라 최후의 향가
-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 구성 : 1-4행 역신의 침범, 5-6행 대상에 대한 의문 7-8행 처용의 관용, 또는 체념으로
           역신과 화자의 대화가 있음(5. 6행)

 

 

[3]  배경설화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처용랑 망해사



[4]
해설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랑)이 자기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을 물리치기 위해 지어 불렀다는 8구체 향가이다. 이 노래의 변형이 고려시대 `처용가'로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실려 있으므로 향찰로 표기된 어려운 향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이다.

  이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
  ①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②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③ 신라시대에는 멀리 서역 지방과도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은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①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 까닭은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 부르며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을 범주를 벗어난 무격 사회에만 있는 풍습이기 �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에서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절정은 7행과 8행이다. 이는 체념적인 주사(呪詞)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상황(초극적인 이미지)을 부각시킨 것으로 후대로 오면서 벽사(?邪)의 위력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만 하다. 이를 무가(巫歌)의 일종으로 보아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내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5] 작가

처용(處容, ?∼?) : 신라 헌강왕 때의 관리. 설화에서는 비를 관장하는 용왕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당시 울산 지방의 호족의 아들 혹은 당시 신라를 내왕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으로도 추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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