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다음그다음

노자 / 본문

Cultivation

노자 /

다음그다음 2017. 7. 27. 10:07

노자[子] : 춘추시대 말기 초(楚: ~BC223 진에 멸망)나라 사람, 생몰연 미상.  본명 : 이이(李耳)

 

① 백성의 눈치를 살피고, 백성의 뜻을 주군에게 용기있게 아뢰는 것이 신하의 본분 ② 잘 하려고 애쓰면 실패하고, 꽉 잡고 장악하려면 천하를 잃고만다.

 ③ 曲卽全 : 굽히는 게 온전해지는 길이다.

 

※ 누구나 남에게 비난을 받으면 일단 반항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보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더 좋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나와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기대하는 순간에 투쟁의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노자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자연은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신이 만든 것 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고, 그렇게 존재하고,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자 원리이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성과를 거두어도 그것은 바로 자연의 도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나 만물은 도밖에 있을 수도 없고 도 밖에서 행동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온갖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영원과 전체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의적으로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인위적인 정치와 전쟁이다. 따라서 노자의 화살은 이 두 가지에 집중되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원리이고, 덕은 원리에 입각한 행동이다. '노자'는 팔일장으로 되었으며 전반을 '도경', 후반을 '덕경'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총 팔일장으로 상·하편으로 나누고, 상편은 '도경', 하편은 '덕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엄격하게 내용이 분류된 것은 아니지만, 상편 '도경'에는 주로 도 즉, 형이상적 원리를 풀었고, 하편 '덕경'에서는 도에 입각한 덕 즉, 행동적인 것을 풀었다.

도는 형이상적 실체이며 만물의 근원이자 우주 운행의 원리이다. '노자' 제25장에 '그 무엇인지 엉킨 것이 천지보다 먼저 나왔으며'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름은 알 수 없고 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지어대라 하겠다'고 하였다.

도는 무형의 실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형적 실재이며, 인식할 수도 없고 이름지어 부를 수도 없는 게 도 다. 도는 무어라 말할 수 없어 무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에서 만물이 저마다 있고 자라고 변화한다. 이렇게 인식할 수 없는 무형의 도에서 만물이 저마다 스스로 있는 현상계로 나타나고 있으니, 있는 현상계의 모습을 가지고 볼 때 도는 바로 '스스로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 노자가 강조하는 '무위자연'의 본뜻이 있다.

도는 원래가 하나의 혼돈한 실재이므로 선·악이나 강·약의 분별도 있을 수가 없다. 즉 이름이 없다.

선·악이나 강·약 같은 대립은 인간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 관념이지 본래의 도에서 그러한 상대적 대립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구분하고 차별하고 분별하려고 한다. 나와 남을 가르고, 삶과 죽음을 나누고, 선과 악을 차별짓는다. 그리고 인간들은 오직 나와, 삶과 선(善)만을 좋아하고, 남과 죽음과 악을 미워한다.

그러나 나와 남, 삶과 죽음, 선과 악은 바로 하나이며, 위치를 바꿔 볼 때는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도를 모르고 하나만 고집하고 한쪽으로만 나가려 하기 때문에 많은 미망(迷妄)이 생기고 결국은 멸망하고 만다. 자연의 도를 따르면 살고, 거역하면 죽게 마련이다. 도는 만물을 조화 속에 언제까지나 생성화육하는 것이다.

천지간 만물 중에서 가장 도를 잘 따르는 것은 물이다. 노자는 제8장에서 ‘최고의 선을 물 같다’ 고 하고 이어 ‘물은 민물을 이롭게 해줄 뿐일체 다투지 않고, 남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해 있으므로 거의 도와 가까운 존재다’ 라고 설명했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고 모진 데 넣으면 모진다. 많이 모아도 물이요, 작게 갈라 놓아도 물이다. 뜨겁게 끓여 증발해도 물이고, 얼어도 물이다. 다시 말해서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를 잃지 않는다.

또 물은 언제나 아래로 처진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은 서로 모여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한 방울의 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강물이나 바다는 위력이 있고 크다. 한 방울의 물은 가장 약하지만 노도(怒濤)는 무섭다. 즉 가장 유약한 것이 가장 강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언제난 강하기만을 바란다. 강하면 꺾이고 굳으면 부숴지게 마련이다. 제 42장에서 노자는 ‘강하고 포악한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36장에서는 ‘유약이 강강을 이긴다’고 하였다.

무위자연의 도를 따라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고집하려고 함으로써 자기 이외의 세계를 잃게 된다. 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유한한 존재다. 나만을 고집하고 남과 전체를 무시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한한 세계를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순간적인 나를 버리고 영원히 대자연과 더불어 생성화육하는 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도에 복귀하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요, 유교에서 말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극기복례(克己復禮)인 것이다.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하였다. 자연이란 스스로 있는 순박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도 순박하게 자연과 더불어 생성화육해야 한다. 되도록 인간적인 욕심과 작위를 버려야 한다. 우선 사람은 먹어야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다음으로 남녀가 짝을 지어야 종족이 단절되지 않고 번성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즉 ‘식(食)과 색(色)’ 은 인간이나 동물의 기본적 욕구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달리 집단생활을 문화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번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비극의 씨가 도사리고 있다. 즉 노자의 말대로 ‘복속에 화가 숨어 있었다’ (제58장). 문화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인류를 타락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다시 도로 복귀하기를 주장하였다. 이것도 도의 법칙이다. 도는 원심력을 가지고 있어 뻗어 나가지만 동시에 구심력에 의해 되돌리기도 한다. 나가기만 하면 도에서 벗어나고 별똥별같이 없어지고 만다.

문화는 결국 인간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 했다.

다음에는 일체의 사치스런 재물욕, 관능적 향락 등을 배제했다. 제12장에 ‘여러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음악소리는 귀를 멀게 하고, 요리는 입맛을 버리게 한다. 사냥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귀중한 재물은 인간의 행동을 사악하게 만든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은 배를 채우거나 눈을 위하지 않으며, 헛된 사치나 관능・허식을 버리고 근원적 실속을 차린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제3장에서 ‘인민의 마음을 허정(虛靜)하게 만들고, 인민의 배를 실하게 채워준다’고 했듯이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실속 있게 배를 채우라고 했다.

다음으로 노자는, 인간은 지식이나 학문을 버리라고 했다. 지식이나 학문이 결국은 간교하게 악용되어 자연스럽게 생육화성할 백성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식을 가지고 제 멋대로 남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또 감정적으로도 남을 괴롭힌다. 사랑하면 좋아하고 미워하면 헤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만큼 믿을 수 없다. 만물을 키우는 도는 감정적 편애를 하지 말아야 한다. 즉 공평무사(公平無私)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남하고 다투지도 않는다. 싸우고 다투는 것은 자기의 욕심,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서로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다투기 마련이다. 노자는 다투지 않는 자가 이긴다고 했다.

이것은 바로 물갈이 유약하고 처하(處下)하라는 뜻에 통한다. 삶의 길은 유약이고, 죽음의 길은 강건이다.

결국 인간은 욕심·지혜·농간·조작을 버리고 허정한 자연, 순박한 자연의 품에 안겨야 모든 사람이 다같이 조화를 이루고 저마다 스스로의 생성화육을 이룩 할 수가 있다. 이것을 하나로 돌아간다. 또는 하나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노자의 포일(抱一)과 복귀(復歸)의 뜻을 우리는 현대적 위기와 더불어 깊이 음미해야 하겠다.

 

 

 

 

'Cultiv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 연습만큼 위대한 재능은 없다.   (0) 2018.01.15
단체(조직)  (0) 2017.07.27
學而  (0) 2016.08.18
수련  (0) 2016.08.04
남을 의식하여 마음을 구속하지 말자!!  (0) 2016.07.31